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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절반을 위한 혁신

    삼양라면 전중융 회장은 미군이 먹고 버린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가난한 동포들을 위하여 라면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물론 저렴하면서 먹을만한 식품이 부족하니 장사가 되겠다는 사업가적 후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1963년 삼양라면은 10원의 가격으로 출시되었다. 5원에 한그릇씩 팔던 꿀꿀이죽보다는 비쌌지만, 쓰레기로 만든 음식 아닌 음식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3년부터 1990년까지 소비자물가는 19배 올랐고, 삼양라면의 가격은 10배가 올랐다. 실질적으로는 가격이 떨어진 셈이다. 그 댓가로 삼양라면은 1988년 5000억원 매출을 달성하는 급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89년 우지 사건이 일어났다. 삼양라면이 공업용 우지를 썼다고 검찰수사까지 받고 매출은 급락했다. 삼양식품은 억울했다. 60-70년대만 해도 가난하던 대중들에게 영양이 풍부한 동물성 기름을 쓰자고 한 것은 정부에서도 칭찬받았다고 한다. 기름의 품질도 국제적 기준 이상으로 좋았다. 하지만 성난 여론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의 키워드는 ‘공업용’이 아니라 ‘우지’이다. 이미 고기국물을 아쉬워하지 않게 된 대중들에게 동물성 지방은 좋지 않은 것, 식물성은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삼양식품은 세상이 바뀐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실 삼양라면의 하락은 우지파동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었다. 안성탕면, 신라면 등 고급화된 라면을 앞세운 농심이 시장점유율에서 역전을 한 상태였다. 삼양라면이 라면을 상징하는 브랜드이긴 했으나, 대세는 더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라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지파동은 고급화라는 대세에 못을 박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까.

    1993년에 영업을 재개하면서 삼양라면도 300원으로 세배 올려진 가격에 나온다. 그리고 1990년부터 2012년까지 소비자물가는 2.4배 올랐는데, 삼양라면은 7.6배 올랐다. 저가 전략에서 고급화 전략으로 바뀐 것이다.

    라면시장뿐 아니라, 70년대까지 한국 기업들의 주류가 기본적인 제품을 싸게 파는 박리다매 전략이었다면, 8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서 90년대 이후엔 고급스러운 기능과 디자인을 더하여 가격을 높이는 고급화 전략으로 바뀌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을 덜게 된 대중들은 이러한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소비자들은 더 좋은 제품에 조금 더 값을 지불할 의사가 있었고, 기업은 올라간 가격만큼 이익이 늘어나니 좋았다.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는.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소득분배가 좋아졌던 시기이다. 상위 20% 가구의 평균 소득을 하위 20% 가구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5분위 소득배율을 보면, 1982년에 5.1배에서 1988년에 4.8, 1992년에 4.4가 된다. 그리고 1997년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

    고급화 전략이 시작되던 80년대와 본격화한 90년대에 국민들은 소득이 고루 함께 올랐고, 기업들의 고급화 전략이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98년부터 상황은 급격히 달라진다. 5분위 소득배율은 1998년에 5.4가 되고, 그 이후 2008년까지 계속 그 수준에서 큰 변화가 없다.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고급화 전략은 어떤 결과를 나을까? 물론 상위 소득층은 고급화를 계속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고급화를 버거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최저 소득층은 살 물건이 점점 줄고, 그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도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기업들이 신사업을 못찾아서 고민이 많은데,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낮은 곳으로 혁신하라고. 신사업이 고객의 니즈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원론은 누구나 안다. 니즈도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고통의 해결, 또 하나는 즐거움의 추가. 우리 기업들은 20-30년동안 즐거움의 추가에 집중해 왔다. 그러다보니 절반의 고통은 못 보고 있었고, 그것은 사업의 영역이 아니라 자선의 영역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삼양라면의 출시도 그랬지만, 산업혁명의 완성인 대량생산은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인류 역사를 바꾸었고 대기업을 가능케 한 것이다.

    모든 사업전략의 기본은 가격 대비 가치를 높이는 것이고, 이의 원천은 혁신이다. 더 좋은 기술, 생산, 유통 방식이다. 한국 기업들이 혁신의 결과를 70년대까지는 가격을 낮추는 것으로 소비자에게 돌려주었다면, 90년대부터는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돌려준 것이다.

    이제 다시 저가형 혁신가들이 나타나야 한다. 좋은 품질의 기본적인 기능을 저렴하게 쓸 수 있는 제품, 그리고 서비스를 개발할 때이다.

    삼양라면의 60년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중들을 교육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급화 트렌드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메뉴판에서 가장 싼 음식을 시키는 것이 검소함의 미덕이 아니라 빈티를 내는 창피함으로 생각한다. 당장 저축도 못하고 빚까지 내면서도 남들 쓰는 고급스러운 물건을 쓰지 않으면 사회에서 소외된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까지 기업들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고급품을 사고, 1-2년 지나면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다 먹지도 못할 만큼 푸짐한 음식을 시키고, 이런 소비생활을 즐기라고 기업들이 부추겨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검소함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고, 내게 필요한 것만 사는 것, 오래 쓰는 것이 현명한 행동임을 기업들이 나서서 광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생활양식에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가 제격임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돈을 버냐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생활비를 낮추어 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절약하여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자선단체의 표어? 아니다. 샘 월튼이 한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통회사,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을 남기고 떠난 사람 말이다.